현실을 무시한 조(兆) 단위 과징금, 금융시장 질서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금융당국이 홍콩 H지수 ELS 판매와 관련해 시중은행 5곳에 총 2조 원 규모의 과징금·과태료를 통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금융사고 예방이나 시장 질서 회복이라는 제재의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은행들은 피해 복구에 중점을 두고 선제적으로 자율배상 절차를 진행해 왔으며, 상당한 비용을 부담하여 책임을 이행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판매금액 전체를 기준으로 과징금을 산정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처분이다. 제재의 목적은 피해자 구제와 시장질서 회복이지, 무차별적인 징벌이 아니다. 실제 피해 규모를 넘어서는 제재는 시장의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오히려 훼손하며, 향후 어떤 금융사도 선제적 배상을 선택하지 않게 만드는 악순환을 초래해 결국 피해자 구제만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자율적 피해구제를 무시한 과징금은 명백한 이중 제재
금융당국은 자율배상을 성실히 이행한 경우 감경하겠다는 원칙을 누차 밝혀왔다. 작년 2월 이복현 전 금감원장 역시 “책임 인정과 실질적 원상회복 조치를 했다면 과징금 감경 요소가 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이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피해구제 노력 자체를 제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번처럼 천문학적 금액의 과징금을 일률적으로 부과한다면, 이미 자율배상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한 은행들에게 또다시 비용 부담을 덧씌우는 이중 제재가 될 수 있다. 이는 금융정책의 일관성과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결정이며, 금융당국이 스스로 약속한 원칙조차 뒤집는 위험한 선례다.
금융노동자 일자리를 위협하는 무책임한 처분
불과 몇 년 전 씨티은행의 소매금융 철수로 전 직원의 2/3에 이르는 금융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외국계 은행은 수익성과 감독환경 변화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만약 이번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조 단위 과징금 폭탄’이 현실화될 경우 국내 시장 철수 가능성을 높여 금융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에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다. 금융당국은 형식적인 과징금 산정 방식이나 규모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이 대한민국 금융시장 질서 회복은 물론 금융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직결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징벌이 아니라 예방 중심의 감독이 필요하다
이번 ELS 사태의 본질은 과거 파생상품, 사모펀드 등 초대형 금융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 금융당국의 무리한 규제완화와 상품 구조의 복잡성, 설명의무 미흡, 내부통제 부실 등 감독 사각지대를 방치한 구조적 문제다. 근본적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과징금만 키우는 방식으론 금융사고를 예방할 수 없다. 이는 지난 정권에서 반복되었던 ‘은행 때리기’와 다를 바 없는 접근이며, 오히려 금융시장 전체의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 체계를 약화시킬 위험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징금의 크기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금융상품 생산·심사 단계부터 판매와 사후 모니터링까지 전 과정을 다시 설계하는 실질적 제도 개선이다. 국민의 삶을 벼랑으로 내모는 금융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금융감독의 핵심이자 책임임을 거듭 강조한다.
2025년 12월 2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직무대행 최호걸